호시나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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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시나 마사유키는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로, 다카토 번주 호시나 마사미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는 1631년 호시나 가문을 계승하고 이름을 마사유키로 바꾸었으며, 이후 데와 야마가타 번, 무쓰 아이즈 번의 번주를 역임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신임을 받아 막부의 중책을 맡았으며, 아이즈 가훈을 제정하여 가신들에게 막부 수호를 강조했다. 그는 주자학을 숭상하고, 도시 정비와 재해 구제에 힘썼으며, 일본 연금 제도의 시초로 여겨지는 노인 부양 정책을 시행했다. 마사유키는 뛰어난 통치자로 평가받지만, 그의 유훈은 후일 아이즈 번에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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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나 마사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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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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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시나 마사유키 |
본명 | 保科 正之 |
출생 | 1611년 6월 17일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 | 1673년 2월 4일 |
묘소 | 후쿠시마현 야마군 이나와시로정의 도쓰 신사 |
신호 | 도쓰 영신 |
관직 | |
관위 | 종5위하・히고국 수, 종4위하・시종, 좌근위권소장, 종4위상, 정4위하・좌근위권중장 겸 히고 수, 증 종3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어머니 | 오시즈노카타 |
배우자 | 사누키번 나이토 마사나가의 딸 기쿠히메 |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 대정 참여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에미쓰, 이에쓰나 |
번 | 시나노국 다카토번 번주, 데와국 야마가타번 번주, 무쓰국 아이즈번 번주 |
씨족 | 도쿠가와 장군가, 호시나 씨 (아이즈 마쓰다이라가) |
양아버지 | '호시나 마사미쓰' |
형제 | 센히메, 다마히메, 도쿠가와 나가마루, 텐슈인, 하쓰히메,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다다나가, 도쿠가와 가즈코, 마사유키 |
의형제 | '마사사다', '마사시게'등 |
자녀 | 고마쓰, 마사요리, 히메히메, 나카히메, 쇼겐, 기쿠히메, '마사쓰네', 마스, 이시히메, 가제히메, 가메히메, 마사즈미, 가네히메, 마쓰다이라 마사카타, 산히메 |
다이묘 경력 | |
다카토 번 | 2대 번주 재임: 1631년 ~ 1636년 전임: 호시나 마사미쓰 후임: 도리이 다다하루 |
야마가타 번 | 초대 번주 재임: 1636년 ~ 1643년 전임: 도리이 다다쓰네 후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
아이즈 번 | 초대 번주 재임: 1643년 ~ 1669년 전임: 없음 후임: 호시나 마사쓰네 |
2. 생애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사생아로 태어난 호시나 마사유키는, 어머니가 하녀였기 때문에 오에요의 영아 살해를 피하고자 호시나 마사미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1629년, 처음으로 형인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등을 만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품을 받으며 도쿠가와 혈통임을 인정받았다.
1631년 호시나 가문의 수장이자 다카토 번의 영주가 되었고, 이름을 "마사유키"로 변경했다. 예칭 ''히고노카미''와 ''사코노에곤추조'', 종4위하의 조정 관위를 받았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3만 코쿠 다이묘 이상의 정치적 권력을 가졌다. 에도성 사쿠라다 문 밖에 저택 건설을 명받고, 조조지의 히데타다 영묘 건설과 닛코 도쇼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17주기 추모 행사를 위임받았다. 또한, 1635년 발효된 ''무가 제법도'' 규정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36년, 야마가타 번 20만 코쿠로 이봉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진압을 위한 증원군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반란이 조기 진압되어 실제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43년, 무쓰국 아이즈 번 23만 코쿠로 다시 이봉되었다. 아이즈 번은 아이즈 지역 ''천령'' 영지의 행정도 위임받아 실제 수입은 46만 코쿠 이상이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로부터 조카인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섭정을 위임받아, 이에쓰나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사실상 일본을 통치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가문의 문장 사용과 성씨 변경 제안을 거절하며, 호시나 가문에 대한 존경심과 도쿠가와 혈통 주류 권력 찬탈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야마자키 안사이를 후원하고, 아이즈 가훈을 함께 작성했다.
1669년, 아들 호시나 마사쓰네에게 아이즈 번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1673년 에도의 미타 저택에서 사망했다. 요시카와 신토의 제자였으며, 이나와시로 호 근처 하나이쓰 신사 부지에 신토 의식으로 묻혔다. 사후 ''가미'' ''하나이쓰 레이신''(土津霊神)으로 신격화되었다.
마사유키의 후손들은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 군대에 패배할 때까지 아이즈 번에 봉해져 있었다.
연도 | 사건 |
---|---|
1631년 (간에이 8년) | 다카토 번주로 습봉했다. |
1636년 (간에이 13년) | 데와국 야마가타 번 2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
1643년 (간에이 20년) | 무쓰국 아이즈 번 23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그 외, 아이즈 난잔 5.5만 석의 막부 영지를 맡았다. |
2. 1. 출생과 성장
게이초 16년(1611년) 음력 5월 7일,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코마츠마루였다.[4] 생모는 호조씨 가신이었던 사카에가의 딸 시즈(후의 쇼코인)로 히데타다 유모의 시녀였다.근세 무가 사회에서는 정실의 체면과 오오쿠의 질서 유지를 위해 첩은 정실의 허가가 필요했고, 하급 여중의 경우에는 적절한 집안의 양녀로 출신을 정리하는 절차가 필요했다.[3] 또한, 서자의 출산은 같은 이유로 에도성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어머니 시즈는 간다 시로가네초에 있는 언니의 남편인 타케무라 스케베에 츠구토시의 저택에서 출산했다.
공처가였던 히데타다는 정실부인 오에요노가타의 눈을 피해 다케다 신겐의 차녀 겐쇼인에게 임신한 시즈를 맡겼다. 겐나 3년(1617년) 겐쇼인의 연으로 옛 다케다 가신 시나노 다카토번주 호시나 마사미쓰가 맡아, 마사미츠의 아들로 양육되었다. 마사미쓰의 친동생 호시나 마사사다[10] 대신 후계자가 되었고, 1631년 3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마사유키의 출생은 히데타다 측근인 노중 도이 도시카츠나 이노우에 마사나리 등 몇 명만 알고 있었으며, 이복형 도쿠가와 이에미쓰조차도 처음에는 몰랐다.[4]
1629년, 코마츠는 처음으로 형인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아버지(은퇴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및 또 다른 형인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만났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품을 받으며 도쿠가와 혈통의 일원임을 인정받았다.
1631년, 코마츠는 호시나 씨의 수장이자 다카토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름을 "마사유키"로 변경했다. ''히고노카미''와 ''사코노에곤추조''라는 예칭과 종5위하의 조정 관위를 받았다.
2. 2. 번주 시대
1636년 데와 야마가타번 20만 석을 배정받았다.[5] 1643년 무쓰 아이즈번 23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면서 호시나 마사사다도 다이묘가 되도록 요청하여 호시나 가문을 지키게 하였다. 마쓰다이라씨를 사용하라는 막부측의 권유도 있었지만, 호시나 가문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거절하였다. 제3대 번주 마사타카 대에 와서야 마쓰다이라씨를 사용하고 신판 다이묘의 반열에 들었다.1651년 이에미쓰는 임종시 마사유키에게 「도쿠가와 종가를 부탁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1668년 「아이즈 가훈 15조목」을 정했다. 제1조에 「아이즈번 사람은 막부를 수호해야 할 존재이며, 번주가 배반하는 일이 있다면 가신은 따라서는 안 된다」고 적어 이후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모두 이를 충실히 지켰다. 막말의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유훈을 지키기 위해 막부수호의 중심인물이 되어 끝까지 유신 세력과 싸웠다.
1631년, 호시나 마사유키는 호시나 씨의 수장이자 다카토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름을 "마사유키"로 변경했다. 그는 또한 ''히고노카미''와 ''사코노에곤추조''라는 예칭과 종4위하의 조정 관위를 받았다. 히데타다의 사망 이후, 마사유키는 이에미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조력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그의 공식 지위인 3만 ''코쿠'' 다이묘가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
1636년, 마사유키는 야마가타 번으로 이봉되었으며, ''고쿠다카''는 20만 ''코쿠''였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동안, 그는 쇼군이 규슈에 파견하기 위해 준비한 증원군의 장군으로 임명되었지만, 군대가 파견되기 전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1643년, 그는 다시 이봉되었고, 이번에는 무쓰국의 아이즈 번으로 이봉되었으며, 그의 ''고쿠다카''는 공식적으로 23만 ''코쿠''로 정해졌다. 그러나 아이즈 번은 또한 아이즈 지역의 모든 ''천령'' 영지의 행정을 위임받았으므로, 그의 실제 수입은 이 금액의 두 배 이상이었다.
간에이 13년(1636년) 7월, 데와국야마가타 번 20만 석을 하사받았다. 이때, 다카토(高遠)의 영민들 사이에서 "지금의 다카토에서 일어설 수 있을까, 빨리 최상의 히고님에게"라고 노래했다.
간에이 14년(1637년), 이에미쓰의 명으로, 호시나 가문에 전해지는 물건들을 마사사다(正貞)에게 양도했다. 이는 호시나 가문의 정통은 마사사다에게 양도하고,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일문의 다이묘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해에 발발한 시마바라의 난에 있어서는, 규슈 제후들의 통솔이 되지 않아 고전하는 막부군의 증원으로 파견이 검토되었지만, 결국 출병하지 않았다.
간에이 20년(1643년), 무쓰국아이즈 번 23만 석을 받아 대귀족으로 발탁된다. 이후, 마사유키의 자손인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막말까지 아이즈 번주를 맡았다.
게이안 4년(1651년), 이에미쓰의 문병을 온 마사유키에게, 이에미쓰는 모기색의 히타타레와 에보시를 주고 "앞으로 호시나 가문은 대대로 모기색 착용을 허가한다"고 말했다.
마사유키는 막부로부터 마쓰다이라 성을 칭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양육해 준 호시나 가문에 대한 은혜 때문에 이를 굳게 사양하고, 평생 호시나 성을 사용했다. 마쓰다이라 성과 아오이 문을 사용하고, 신판에 열거된 것은, 3대 마사카타가 된 이후였다.
연도 | 사건 |
---|---|
1631년 (간에이 8년) | 다카토오 번주로 습봉했다. |
1636년 (간에이 13년) | 데와국 야마가타 2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
1643년 (간에이 20년) | 무쓰국 아이즈 와카마츠 23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그 외, 아이즈 난잔 5.5만 석의 막부 영지를 맡았다. |
2. 3. 막정 참여와 만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근면 성실하고 유능한 이복동생 호시나 마사유키를 총애하여 1636년 데와 야마가타번 20만 석을 배정하였다. 1643년 무쓰 아이즈번 23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면서 호시나 마사사다도 다이묘가 되도록 요청하여 호시나 가문을 지키게 하였다. 마쓰다이라씨를 사용하라는 막부 측의 권유도 있었지만, 호시나 가문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거절하였다. 3대 번주 마사타카 대에 와서야 마쓰다이라 씨를 사용하고 신판 다이묘의 반열에 들었다.[5]1651년 이에미쓰는 임종 시 마사유키에게 "도쿠가와 종가를 부탁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1668년 "아이즈 가훈 15조목"을 제정했다. 제1조에 "아이즈 번 사람은 막부를 수호해야 할 존재이며, 번주가 배반하는 일이 있다면 가신은 따라서는 안 된다"고 적어 이후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모두 이를 충실히 지켰다. 막말의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유훈을 지키기 위해 막부 수호의 중심인물이 되어 끝까지 유신 세력과 싸웠다.
1669년 은거에 들어가 1673년 12월 18일 에도에서 향년 63세(만 61세)로 사망했다.
3. 정책
호시나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동생으로서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이에미쓰는 마사유키를 측근 상담역으로 특별 대우했으며, 1636년에는 데와국야마가타 번 20만 석을 하사했다. 1643년에는 무쓰국아이즈 번 23만 석으로 옮겨 대귀족이 되었으며, 이후 마사유키의 자손인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막말까지 아이즈 번주를 맡았다.
1651년, 이에미쓰는 임종 시 마사유키에게 "히고요, 종가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1668년 "아이즈 가훈 15개조"를 제정하여 아이즈 번이 쇼군가를 수호해야 함을 명시했다.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보좌역(대정참여)으로서 마사유키는 문치 정치를 추진했다. 말기 양자 금지를 완화하고, 순사 금지를 막부 제도로 정했으며, 다이묘 증인 제도 폐지를 내걸었다. 다마가와 상수도 개착으로 에도 시민의 식수 공급에 기여했다.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에는 서민 구제와 대규모 화재 대책을 실시했다. 주요 도로 폭을 확장하고, 방화 공터를 설치했으며, 료고쿠 다리 신설, 칸다 강 확장 등 에도 방재성을 향상시켰다. 불탄 에도성천수각 재건에는 "성 방어에 불필요하다"며 반대하여 결국 재건되지 않았다.
아이즈 번에서는 산업 육성을 위해 옻나무 등 8개 품목의 번외 반출을 제한하고, 사창제를 만들어 기근에 대비했다. 영아 살해를 금지하고, 촌장의 백성 처벌을 금지했으며, 순사를 금지했다. 주자학을 장려하여 학문과 무예를 중시하는 번 풍조를 만들었다. 90세 이상 노인에게는 신분에 관계없이 현미를 지급했는데, 이는 일본 연금 제도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닛신칸의 전신인 게이코도(稽古堂)를 설치하여 번사 자제 교육에도 힘썼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미쓰쿠니, 이케다 미쓰마사와 함께 에도 시대 초기의 3대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화재 현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자는 사형, 방화범은 극형에 처하는 등 사회 질서 유지에도 힘썼다.[8]
3. 1. 막정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이복동생 호시나 마사유키를 매우 아꼈다. 당시 막부에는 도이 도시카쓰, 사카이 다다카쓰 (고하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홋타 마사모리 등 인재가 있었지만, 이에미쓰는 측근 상담역으로 마사유키를 특별 대우하여 쇼군가의 동생임을 알렸다. 간에이 9년(1632년) 히데타다 사망 후, 이에미쓰는 마사유키에게 은 500장을 하사하고, 시바 조조지 묘 건립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닛코 도쇼구 참배에 동행시켰다. 12월에는 종4위하로 서임했는데, 이는 10만 석 이상 다이묘에게 주어지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에도 성사쿠라다 문 밖에 저택을 주고, 에도 성에 초청해 직접 차를 대접했으며, 메이쇼 천황 배알 시 선발대에 지명했다.간에이 13년(1636년) 7월, 데와국야마가타 번 20만 석을 하사받았다. 다카토 영민들은 "지금의 다카토에서 일어설 수 있을까, 빨리 최상의 히고님에게"라고 노래하며 마사유키의 선정을 칭송했고, 3000명이 도산하여 마사유키를 따라 야마가타로 갔다.
간에이 14년(1637년), 이에미쓰는 호시나 가문 전래 물건을 마사사다(正貞)에게 양도하며, 호시나 씨 정통은 마사사다에게,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일문 다이묘로 한다는 뜻을 밝혔다. 같은 해 시마바라의 난 진압을 위해 막부군 증원군 파견이 검토되었으나, 결국 출병하지 않았다.
간에이 10년(1633년) 무라야마 군 시라이와 영주 사카이 다다시게에 대한 영민들의 소송으로, 간에이 15년(1638년) 다다시게는 개역되었다. 시라이와 영은 천령이 되었으나, 불만을 품은 영민들이 봉기하여 인접 영주 마사유키에게 소송을 제기했다(시라이와 잇키). 마사유키는 잇키 관계자를 모두 체포, 처형했는데, 이는 무가 제법도 개정에 따른 월경 진압 규정의 영향도 있었다.[5]
간에이 20년(1643년), 무쓰국아이즈 번 23만 석을 받아 대귀족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마사유키 자손인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이 막말까지 아이즈 번주를 맡았다.
게이안 4년(1651년), 이에미쓰는 문병 온 마사유키에게 모기색 히타타레와 에보시를 주며 "호시나 가문은 대대로 모기색 착용을 허가한다"고 했다. 이는 쇼군과 동격임을 알리는 의미였다. 이에미쓰는 임종 시 유력 다이묘들에게는 사카이 다다카쓰를 통해 "새 쇼군을 도우라"고 명했으나, 마사유키에게는 홋타 마사모리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히고요, 종가를 부탁한다"고 직접 유언했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간분 8년(1668년) "아이즈 가훈 15개조"를 제정, 첫 조항에 "아이즈 번은 쇼군가를 수호해야 하며, 번주 배반 시 가신은 따르면 안 된다"고 명시했다. 막말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유훈을 굳게 지켜 사쿠보파 중심인물로 삿초 군 중심 관군과 싸웠다.
간분 9년(1669년) 4월 27일, 적남 호시나 마사쓰네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거했다.
간분 12년(1672년) 12월 18일, 에도 미타 에도 번저에서 사망했다(향년 63세). 레이샤호는 영신. 생전 간분 6년(1666년) 신불습합을 배척하고 영내 사찰을 정리했다. 생전 신사 건립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 전 사망했다. 묘소는 후쿠시마현야마군이나와시로정 미네야마에 있다. 이후 2대 마사쓰네를 제외한 아이즈 번주는 신식으로 모셔졌다. 엔포 3년(1675년), 묘소 인접 쓰치쓰 신사가 건립되어 제신으로 모셔졌다.
마사유키는 막부로부터 마쓰다이라 씨 칭호를 권유받았으나, 호시나 가문 은혜를 생각해 평생 사양했다. 마쓰다이라 성과 아오이 문 사용, 신판 등재는 3대 마쓰다이라 마사카타 때부터였다.
사후, 유언에 따라 조카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보좌역(대정참여)으로 문치 정치를 추진했다. 말기 양자 금지를 완화해 각 번 절가를 줄였고, 아이즈 번에서 실시하던 순사 금지를 막부 제도로 정했으며, 다이묘 증인 제도 폐지를 내걸었다. 다마가와 상수도 개착으로 에도 시민 식수 공급에 기여했다.
메이레키 3년(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후, 서민을 구제하고, 대규모 화재 대책으로 주요 도로 폭을 10.9m에서 16.4m로 확장했다. 방화 공터로 우에노에 히로코지를 설치, 료고쿠 다리 신설, 시바와 아사쿠사에 신호 개착, 칸다 강 확장 등 에도 방재성을 향상시켰다. 불탄 에도성천수각 재건 시, 천수대는 가가번주 마에다 쓰나노리(마사유키 사위)가 미카게 이시로 높이 6칸으로 축소해 재건했지만, 마사유키는 천수 구조물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가 기후 성에 축조한 것이 시작이며, 성 방어에 불필요하다"며 반대했다. 결국 에도성 천수각은 재건되지 않았고, 이후 아라이 하쿠세키 등이 재건을 계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막각(사카이 다다카쓰 (고하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아베 다다아키 등)도 마사유키 건의를 받아들여 400만 냥 넘는 축재를 바탕으로 복지, 재해 구제, 도시 정비에 주력했다. 마사유키 사후, 화폐 개주 등 경제 정책 결여로 막부는 재정난에 빠졌고,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오기와라 시게히데 등용 등 재정 재건책을 강구했다.
3. 2. 번정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는 아이즈번의 번정(藩政)에도 힘을 기울였다. 1643년 12월, 옻칠, 납, 밀랍 등 8개 품목의 번외 반출을 제한하는 유통 금지령을 내리고, 옻나무를 벌채 금지 수종으로 지정하는 등[6] 산업 육성에 힘썼다. 1647년에는 여러 숙소를 정비했다. 1655년에는 기근에 대비하여 사창제를 만들고, 영아 살해를 금지했다. 1660년에는 촌장이 백성을 임의로 처벌하는 것을 금지했다. 1661년에는 시세미 매입제를 시작했고, 간분 연간에는 도량형을 통일했다. 번사(藩士)에게는 1661년에 순사를 금지했다. 또한 주자학을 번 학문으로 장려하여 학문을 숭상하고 무예를 중시하는 번 풍조를 만들었다. 90세 이상 노인에게는 신분에 관계없이 1일당 현미 5홉을 지급했는데, 이는 일본 연금 제도의 시작으로 여겨진다.닛신칸의 전신인 게이코도(稽古堂)를 설치하여 번사(藩士) 자제 교육에도 힘썼다.
미토번의 도쿠가와 미쓰쿠니, 오카야마번의 이케다 미쓰마사와 함께 에도 시대 초기의 3대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도쓰 레이신 겐코로쿠(土津霊神言行録)』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가모씨 시대부터 아이즈 번에서 행해졌던 잔혹한 형벌들을 폐지했다. 그는 "죄인을 괴롭혀 죽이는 것은 형벌을 농락하는 것"이라며, 화형을 집행할 경우에도 죄인이 즉시 죽도록 강한 불로 태우라고 지시했다[7].
한편, 『가세지쓰키(家世実紀)』에 따르면,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직후, 마사유키는 화재 현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자는 사형, 방화범은 극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대화재 이후 불안정한 사회 정세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8].
4. 사상
호시나 마사유키는 주자학을 열렬히 신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임했다. 신분 제도를 고착화하고 막번 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데 힘썼다. 야마자키 안사이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유일치를 주장했으며, 우라베 신도 제55대 전통 계승자였다.[9]
또한 주자학 신봉자였기에 다른 학문은 탄압했다.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미츠마사가 양명학자 쿠마자와 반잔을 초빙했으나, 번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하게 했다. 가가 번주 마에다 츠나노리에게는 주자학 이외의 서적을 수집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유학자 야마가 소코는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코 번에 유배되었다.
5. 평가
호시나 마사유키는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 그러나 "도쿠가와 쇼군에게의 충성은 절대적이다"와 "이를 거스르는 자는 나의 후손이 아니며 따르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그의 발언은 훗날 아이즈 번에게 고난의 근원이 되었다.[1] 마쓰다이라 가타모리(1836–1893)는 마사유키의 말을 따라 쇼군을 섬기는 데 헌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고한 충성은 사쓰마와 조슈의 분노를 샀고, 결국 아이즈는 보신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격전지 중 하나가 되었다.[2]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이복 동생인 마사유키를 매우 아꼈으며, 그를 육친으로 대하고 정무에도 참여시켰다. 1636년, 데와국야마가타 번 20만 석을 하사받았을 때, 다카토(高遠)의 백성들은 마사유키의 선정을 칭송하며 그를 따라 야마가타로 가고 싶어했다. 실제로 3000명에 달하는 다카토 백성들이 도산하여 마사유키를 따라 야마가타로 갔다.
1638년, 시라이와 잇키가 발생했을 때, 마사유키는 잇키 관계자를 모두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는 시마바라의 난 직후 잇키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인정사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5]
1651년, 이에미쓰는 죽음의 자리에서 마사유키에게 "히고요, 종가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감명받은 마사유키는 1668년 "아이즈 가훈 15개조"를 제정하여 아이즈 번은 쇼군가를 수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번주와 번사들은 이를 충실히 지켰으며, 막말의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유훈을 굳게 지켜 삿초 군과 싸웠다.
마사유키는 마쓰다이라 성을 칭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양육해 준 호시나 가문에 대한 은혜 때문에 평생 호시나 성을 사용했다. 마쓰다이라 성과 아오이 문을 사용하고, 신판에 들어간 것은 3대 마쓰다이라 마사카타 때부터였다.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및 설명 |
---|---|
친할아버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친아버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친어머니 | 조코인 - 오시즈, 시즈라고도 불림, 가미오 에이카의 딸 |
양아버지 | 호시나 마사미쓰 |
양어머니 | 겐쇼인 (1622년 사망) |
정실 | 나이토 마사나가의 딸, 기쿠히메 (1619년 - 1637년) |
장남 | 고쇼 (1634년 - 1638년) - 요절 |
계실 | 세이코인 (1620년 - 1691년) - 오만, 후지키 히로유키의 딸, 이전에 마사유키의 이복 누나인 도후쿠몬인을 모심 |
차남 | 호시나 마사요리 (1640년 - 1657년) |
장녀 | 하루히메 |
차녀 | 나카히메 (1643년 - 1649년) - 요절 |
삼남 | 쇼겐 (1645년) - 요절 |
사남 | 호시나 마사쓰네 (1646년 - 1681년) |
오녀 | 이시히메 (1648년 - 1667년) - 이나바 마사미치의 정실 |
육녀 | 후히메 (1649년 - 1651년) - 요절 |
칠녀 | 가메히메 (1650년 - 1651년) - 요절 |
오남 | 호시나 마사즈미 (1652년 - 1671년) |
측실 | 우시다 씨 (1623년 - 1651년) |
삼녀 | 키쿠히메 (1645년 - 1647년) - 요절 |
사녀 | 마스 (1648년 - 1666년) - 마쓰히메, 마에다 쓰나노리의 정실 |
측실 | 사와이 씨 |
팔녀 | 킨히메 (1658년 - 1659년) - 요절 |
측실 | 에이주인 (1645년 - 1720년) - 오키 씨 |
육남 | 마쓰다이라 마사요리 (1669년 - 1731년) |
구녀 | 산히메 (1673년) - 마사유키 사후 출생, 요절 |
성광원도 참고
정유(호시나 마사유키)의 장녀인 히메히메는 우에스기 가문에 시집간 후, 생모인 오만노가타의 넷째 딸인 마쓰히메(마스)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잘못하여 독을 마시고 급사했다고 전해진다. 오만노가타는 측실이 낳은 마스가 자신이 낳은 히메히메보다 더 큰 번인 마에다 가문에 시집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암살을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 후 히메히메는 우에스기가의 보리소인 린센지에 묻혔다. 정유는 이후 우에스기가의 쓰나카츠 급사 시 말기 양자에 관해 원조했다. 마스는 무사히 마에다 가문에 시집갔으나 18세에 아이를 사산하고 자신도 일찍 죽었다.
아이즈 가문 가훈 제4조에는 부녀자에 대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설에 따르면 이상의 사건이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쓰히메 독살 미수 및 히메히메 오인 사망은 오만노가타가 주모자라는 설이 현재 정설이다. 그 출처는 아이즈 번의 정사인 『아이즈 번 가세실기』로, 본문 중에는 "마쓰히메의 혼례로 친정에 돌아와 있던 히메히메의 상태가 나빠져 혼례 2일 후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그 후에 본문에 소문자를 보충하여 "독이 든 마쓰히메의 수라상이 측근의 기지로 바뀌었기 때문에 히메히메가 그 독이 든 수라상을 먹고 죽었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사실을 말한 본문에 대해 100년 이상 후의 편찬 시에 이런 소문이 있다고 덧붙인 문구가 근원이다. 정사의 사실이 아니라, 나중에 더해진 전해지는 말인 것이다. 실제로 『아이즈 번 가세실기』에서는 그 후, 히메히메는 급병사로 처리되었고, 호시나 가문, 우에스기 가문 모두 일절 수사나 처분도 하지 않았다. 또한, 오만노가타는 그 후에도 정유의 정실 부인으로서 같은 저택에 살며, 우에스기, 마에다, 이나바 가문과 후세까지 친하게 교제를 계속하고 있다. 정유의 사후에도 2대 번주인 마사쓰네의 생모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옛 다이묘 가문에 대한 터부가 없어지자, 에도 연구가인 미타무라 엔교가 이런 에피소드를 언급하여 발간했고, 그것이 차츰 알려져 소설의 소재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엔교는 좋고 나쁨이 몇 가지 있는데, 나쁜 에피소드만 언급하고, 성인이라고 불리는 호시나 마사유키가 어째서 오만노가타를 총애했는지 모르겠다며 오만노가타를 독단적으로 악녀로 단정하고 있다. 현재의 오만노가타 악녀 설은 이런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7. 관련 작품
- 만화
- * 미나모토 타로의 풍운아들
- * 나카지마 겐지의 《명군 호시나 마사유키~메이레키 대화편~》
- *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
- * 야마모토 오사무의 소바몬 닛폰 소바 기행
- 소설
- * 우부카타 토우의 천지명찰
- * 나카무라 아키히코의 《호시나 히고노카미 오미미초》, 《호시나 히고노카미 오소데초》
- 영화
- * 그림자 군단 하토리 한조(1980년, 배역: 야마무라 사토시)
- * 천지명찰(2012년, 배역: 마츠모토 코시로)
- 텔레비전 드라마
- * 에도를 벤다 아즈사 우콘 은밀장(TBS, 1973년, 배역: 타케와키 무가) - 주인공 아즈사 우콘(쌍둥이)의 형으로 설정
- * 도쿠가와 부인들(후지 TV, 1974년, 배역: 토야마 타카시)
- * 도쿠가와 삼국지(NET 텔레비전, 1975년, 배역: 나카야 노보루)
- * 야규 일족의 음모(간사이 텔레비전, 1978년, 배역: 나카무라 코우키)
- * 핫토리 한조 그림자 군단(간사이 텔레비전, 1980년, 배역: 야마무라 사토시)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NHK 대하드라마, 2000년, 배역: 하마다 마나부(유년기: 사토 요시키, 소년기: 마츠모토 노부오)
- * 에도 불타다(NHK, 2016년, 배역: 타카하시 잇세이)
참조
[1]
웹사이트
若し二心懐かば、則ち我が子孫にあらず、面々決して従うべからず」
http://aizu-matsudai[...]
会津松平家奉賛会
2024-12-03
[2]
웹사이트
会津側の戦死者は約2,400名、戦闘に巻き込まれて殺害された農夫や婦女なども含めると数千名に上ったとの説もある。
https://www.ndl.go.j[...]
National Diet Library. Japan.
2024-12-03
[3]
서적
江の生涯
中公新書
[4]
웹사이트
保科正之は江戸時代初期の会津藩主。…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ニュース
2016-04-16
[5]
웹사이트
義民のあしあと『白岩義民(間沢村三霊供養碑(東泉寺))』
http://welfare.so-go[...]
[6]
문서
会津事始
[7]
서적
江戸時代の罪と罰
草思社
[8]
서적
江戸時代の罪と罰
草思社
[9]
서적
図説 福島県史
[10]
문서
마사사다는 후에 [[이노번]]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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